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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정치와 탕평정치

by 우공 박순화 2023.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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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장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의 붕당정치 변화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사화를 극복하고 정권을 잡은 사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후기 신진사대부 중 급진파 사대부들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이들은 조선 전기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특히 세조의 쿠데타와 즉위를 도운 세력을 훈구파 또는 훈구세력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끝까지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켰던 신진사대부를 온건파 사대부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조선이 건국되자, 고향에 내려가 학문 연구에 힘씁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제자들이 많아져 '선비가 숲처럼 많아'집니다. 그래서 이들을 '선비 사'자와 '수풀 림'자를 써서 사림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성종 시기 언론 기구인 3사에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네 차례 사화가 일어났고 사림 세력은 그때마다 세력이 꺾였습니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병력을 생산해내는 건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건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병력을 더 많이 뽑아낼 수 있습니다. 사림에게는 서원이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지방 곳곳에 사림이 세운 사립학교 서원에서 제자들이 끊임없이 양산되고 향약을 통해 농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 사림은 마침내 선조 대에 이르러 훈구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게 됩니다.

 

붕당 정치의 성립과 예송 논쟁

하지만 훈구 세력을 처리하는 입장 차이, 학문적 차이, 지역적 차이 등으로 사림 세력은 서인동인으로 나뉩니다. 붕당정치의 시작입니다.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집니다. 처음 정권을 잡았던 세력은 북인입니다. 이때는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 시기입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정권은 다시 서인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병자호란을 겪습니다.

현종 시기에는 서인과 남인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예송 논쟁이 일어납니다.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에게는 나이 어린 왕비가 있었습니다. 예송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자의대비입니다. 얼마나 나이가 어렸냐 하면 인조의 둘째 아들 효종과 효종비보다도 어렸습니다. 당연히 효종이 먼저 죽습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새어머니가 살아있는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이때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입장이 달랐습니다.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므로 상복을 짧게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남인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기는 하지만 왕이 되었으므로 큰아들의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1차 예송입니다.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현종은 서인의 눈치가 보여 서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효종비가 사망합니다. 그러자 똑같은 논쟁이 다시 일어납니다. 서인은 둘째며느리이기 때문에 자의대비가 상복을 짧게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둘째 며느리이기는 하지만 왕비이므로 큰 며느리 대우를 해서 길게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차 예송입니다. 이때는 현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로 정치적, 학문적 견해가 달라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함께 협력해서 정치를 해나가기도 했습니다.

 

환국과 붕당 대립의 격화

하지만 숙종 때는 상황이 살벌하게 변합니다. 정치 주도권을 잡고자 했던 숙종은 상황에 따라 서인과 남인 번갈아가면서 집권당을 일시에 바꾸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환국이라고 하는데, 숙종 때 일어난 세 차례의 환국을 거치면서 붕당 서로 간에 적대감이 커졌습니다. 이제는 정권을 빼앗기는 순간 정적들로부터 사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기를 쓰고 정권을 지키려고 했겠지요? 결국 최종 승자는 서인이 됩니다. 서인은 남인의 처리를 놓고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습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

이처럼 붕당의 대립이 심해지던 시기에 즉위한 왕이 영조입니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붕당간의 대립을 완화하기 위해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를 쓰고 함께 의논하여 국정을 처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탕평정치를 실시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뜻을 새긴 탕평비를 조선 최고의 성리학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세웠습니다. 경국대전의 후속법전인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을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영조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균역법을 실시해서 군포를 2필에서 50%나 할인해서 1필로 줄여줍니다. 또 태종 때 설치되었다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신문고를 부활하여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호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는 지금도 청계천이 흐릅니다. 조선 시대에는 청계천이 자주 범람하여 홍수피해가 컸다고 합니다. 영조는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공사를 단행했습니다.

 

영조 다음에 즉위한 왕이 정조입니다. 정조도 영조의 뜻을 이어받아 탕평정치를 해나갑니다. 정조는 왕실 도서관이자 정책 연구기관인 규장각을 세우고 이곳에서 젊은 관리들과 함께 정책을 연구했습니다. 젊은 관리를 직접 재교육시키기도 했는데, 이 제도를 초계문신제라고 합니다. 다시 법전을 정리해 대전통편을 편찬하기도 한 정조는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자신을 호위하게 했습니다.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신도시 수원 화성을 축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정약용이 발명한 기중기가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또, 수원 화성 축조 과정을 세세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는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조 시기 조선에도 상공업이 발달하여 자유로운 상공업 활동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시전 상인들에게 허가받지 않은 상인(난전)이 상행위를 금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이를 금난전권이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자유로운 상행위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정조는 통공정책(신해통공)을 통해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행위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영조와 정조 시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억눌렸던 붕당간의 대립은 정조가 사망하고 나자 더 큰 폐단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무서운 선생님이 자습감독하다가 교실을 나갔을 때의 상황을 떠올려보기 바랍니다.

 

원포인트 레슨

1. 붕당정치의 성립과 전개, 갈등 심화와 탕평정치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관련 사건들과 함께 정리해두세요.

2. 예송과 환국 관련 키워드와 순서를 알아두세요.

3. 영조와 정조의 정책을 정리해두세요. 특히 정조가 자주 출제되었습니다.

 

기출풀이

[2023-대학수학능력시험]

 

붕당 정치의 흐름을 물어본 문항입니다. ‘동인이나 서인으로 나눠지게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가) 자료는 붕당 정치가 성립되었던 선조 시기, ‘탕평비를 세웠다’는 것으로 보아 (나) 자료는 탕평 정치가 시작되었던 영조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송 논쟁과 환국을 거치면서 붕당 대립이 심화된 것이 배경이 되어 붕당 대립을 완화하고자 영조와 정조 대에 탕평 정치가 실시되었습니다. 따라서, (가), (나) 시기 사이에는 예송 논쟁과 환국(①)이 들어가야 합니다.

사이 시기 문제는 난이도가 높은 유형입니다. 자료를 너무 자세히 독해하기보다 아는 키워드가 있는지를 찾아보고 흐름을 찾아 보아야 합니다. 키워드와 흐름이 모두 중요한 주제입니다.

 

[2023-3월 학력평가]

정조에 대해 물어본 문항입니다. 자료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조선 22대 왕’, ‘수원 화성’, ‘장용영’, ‘규장각’ 등을 통해 (가) 왕이 정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조는 그 외에도 탕평 정치를 실시(④)하고 초계 문신제, 통공 정책 등을 실시하였습니다.

기존 교육과정에서 정조가 꽤 자주 출제되었습니다. 조선 전기 세종과 마찬가지로 관련 키워드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 교육과정에서는 출제 비중이 다소 낮아졌습니다. 그래도 업적이 많은 만큼 언제든 다시 출제될 수 있는 주제이니 키워드 위주로 잘 정리해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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