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경기 많이 보시나요? 스포츠 경기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역전승입니다. 특히, 약팀이 강팀을 상대로 역전을 하여 승리를 거머쥐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삼국 통일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변방에 치우쳐 발전이 늦어 가장 늦게 전성기를 맞이했던 약소국 신라가 마침내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
알고 있다시피 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진흥왕은 백제 성왕과 함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았습니다. 원래 약속은 한강 하류는 백제가, 상류는 신라가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유역을 통째로 차지해 버립니다.
화가 난 성왕은 신라를 공격하였고, 불행하게도 관산성 전투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백제는 신라에 대한 원한이 깊이 맺혔고, 멸망하는 순간까지 신라를 공격했습니다. 백제 마지막왕 의자왕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출전하여 신라 서쪽 4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신라의 교통 거점인 당항성마저 공격했습니다. 마침내 신라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대야성마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신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신라의 선덕여왕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김춘추를 파견합니다. 김춘추가 먼저 간 곳은 고구려였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았던 연개소문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연개소문은 신라를 도와줄테니 충청 이북 지역을 돌려달라고 합니다. 그 말은 곧 백제의 신라 공격의 발단이 되었던 한강 유역을 되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춘추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김춘추는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태종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고구려를 꺾고 동아시아 강자로 군림하고 싶었던 당나라에게는 김춘추의 방문이 기회로 여겨졌습니다. 백제를 함께 공격해주면, 후에 고구려를 공격할 때 지원을 하겠다는 신라의 제안을 당 태종이 받아들임으로써 나당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군은 최선을 다해 방어했으나 660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이 주도하고 왜가 지원하여 백제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나당 연합군의 다음 목표는 고구려였습니다. 고구려군이 맞서 싸웠으나 내분으로 인해 결국 고구려도 668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고구려에서도 안승, 검모잠 등이 주도한 고구려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만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신라가 백제를 배신했듯, 당도 신라를 배신하고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욕심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나당 동맹은 깨어지고 나당 전쟁이 시작됩니다.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신라군이 당군에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을 경계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게 됩니다. 이때가 앞으로 해도 676, 뒤로 해도 676년입니다. 학자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이 아닌 나당 전쟁이 끝나고 당군이 물러난 676년을 삼국 통일의 해로 봅니다.
어떤가요? 동아시아의 최약팀이었던 신라가 여러 강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된 이야기가 마치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4강에 오른 것처럼 짜릿하지 않나요?
이후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통일 신라가 존재하고, 북쪽에는 발해가 건국됩니다. 조선 후기 유득공은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불렀답니다.
통일신라의 발전
삼국 통일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김춘추는 진골 귀족 신분으로 처음 신라 왕위에 오릅니다. 원래 신라에서는 골품제 중 최상층인 성골만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공식이 깨진 첫 사례가 바로 김춘추입니다. 김춘추를 태종무열왕이라고 부른답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신라가 멸망한 다음 해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문무왕이 즉위합니다. 문무왕은 삼국 통일 시기 내내 신라를 이끌었던 왕입니다. 문무왕은 고구려 멸망, 나당 전쟁을 치르며 삼국 통일을 완성한 왕입니다.
이후 통일된 신라에서 문무왕 다음에 즉위한 왕이 바로 신문왕입니다. 즉위 직후 김흠돌의 난이 일어나 왕권을 위협하는 위기가 닥칩니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나서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정책으로 관료전 지급과 녹읍 폐지가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고려의 토지 제도 기억나나요? 지금은 공무원들의 월급을 나라에서 걷은 세금으로 주지만 옛날에는 국가 통제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고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걷어 현금으로 월급을 주지 않고 특정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수조권)를 월급 대신 주었습니다. 그런데 녹읍이라는 것은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과 더불어 그 토지에서 농사짓는 사람의 노동력을 가져다 쓸 수 있는 권한까지 준 것입니다. 관료전은 노동력을 가져다 쓸 수 있는 권한을 빼고 세금을 걷을 권리만 남겨놓은 것입니다.
신문왕이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했다는 것은 관료들이 월급으로 받은 토지에서 노동력은 가져다 쓸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관료들은 대부분 귀족들이었겠지요? 그래서 신문왕의 이 정책은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책이었습니다.
신문왕에게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 과제는 이제 막 통일을 달성하면서 넓어진 땅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나라 시스템을 다시 정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왕은 지방을 9개 주로 다시 나누었고, 수도 경주가 치우쳐져 있어서 경주 외 주요 거점에 5개의 작은 수도를 두었습니다. 이 제도를 9주 5소경 체제라고 부릅니다. 또, 군사 제도를 9서당 10정으로 재편하였습니다.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원성왕 때는 국학의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독서삼품과라는 일종의 졸업시험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후삼국 시대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통일 신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진골 귀족 세력이 강해졌고, 마침내 진골 귀족들이 서로 왕이 되겠다며 왕위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당연히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지방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지방에서 힘이 강한 가문이 스스로 무장하여 자기 지방에서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일 신라 말 지방의 힘이 있는 이 세력들을 호족이라고 부릅니다. 고려를 세운 왕건도 지금의 개성 지역의 호족 출신이었습니다.
통일 신라 말, 궁예가 후고구려를, 견훤이 후백제를 각각 세우면서 신라의 힘이 미치는 지역은 경주 중심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후삼국 시대는 다시 고려로 통일됩니다.
발해의 성장
고구려 멸망 후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 즉, 옛 고구려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698년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이 옛 고구려인과 말갈인들과 연합하여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합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얼마 안 되었고 고구려 옛 땅에서 건국된 나라인만큼 발해는 고구려와 문화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정혜공주묘와 정효공주묘, 온돌과 기와 등을 보면 고구려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왕들도 고구려 계승 의식이 있었습니다. 일본에 보낸 편지는 스스로를 '고려왕'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려는 우리가 알고 있는 태조 왕건의 고려가 아닌 고구려를 가리킵니다.
발해는 초기에 당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장문휴를 파견하여 중국 땅 등주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당, 신라, 왜와 친선 관계를 맺으며 활발하게 교류하였습니다. 중앙 정치 기구로 당의 3성 6부제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6부를 좌사정, 우사정 각 3부로 나누었고, 6부의 명칭을 유교식 명칭으로 사용하는 등 독자성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지방은 5경 15부 62주의 행정 구역으로 구분하여 통치하였습니다.
발해는 전성기에 중국인들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바다 건너 성스러운 나라'라는 뜻입니다.
10세기 중반에 동아시아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중국 대륙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라는 분열 시기가 전개되었습니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후삼국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이 시기 중국 북방에서는 유목민족인 거란이 성장하였습니다. 발해는 결국 거란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발해 유민들 중 상당수는 당시 새롭게 통일된 한반도의 주인이 된 고려로 이주하였습니다.
원포인트 레슨
1. 신문왕의 업적을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해두세요.
2. 발해의 특징을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해두세요.
3.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의 순서를 키워드와 함께 정리해두세요.
기출풀이
[2021-9월 모의평가]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 중 백제 부흥 운동에 대한 문항입니다. 자료의 ‘도침’, ‘복신’, ‘의자왕의 아들’, ‘흑치상지’ 등을 통해 백제 부흥 운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①).
백제 부흥 운동, 고구려 부흥 운동, 나당 전쟁의 키워드를 잘 알아두고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난이도가 올라가면 순서를 물어보거나 시기 사이에 있었던 사실을 물어볼 수도 있으니 키워드와 순서를 함께 정리해야 합니다.
[2022-대학수학능력시험]
통일신라 신문왕의 업적에 대한 문항입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는 등 귀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는 한편, 국학을 설립하고 유학 교육을 장려하였습니다. 또, 통일 후 넓어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9주 5소경 체제로 편성하였습니다(⑤).
통일신라에서는 신문왕이 주로 출제됩니다. 신문왕의 키워드는 9주 5소경-국학-녹읍/관료전 정도이니 정리해두세요.
[2023-대학수학능력시험]
발해의 특징에 대해 물어보는 문항입니다. 자료의 ‘고구려 유민’, ‘동모산’, ‘등주 습격’ 등을 통해 (가) 나라가 발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는 지방을 5경 15부 62주로 나누어 통치하였습니다(④).
발해는 자주 출제되었던 주제입니다. 통일신라가 나오거나 발해가 나오거나 하는데, 발해가 더 많이 나왔습니다. 대조영, 해동성국, 고구려 계승 의식 등이 주요 키워드입니다. 하지만 다소 생소한 5경 15부 62주도 선지에 자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통일신라의 9주 5소경, 고려의 5도 양계와 헷갈리지 않게 정리해두세요. 발해는 영토가 넓어 관련 숫자가 크다는 점 기억해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