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기 왕들
이 칼럼을 보는 독자라면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이거나 예비수험생, 또는 수험생이나 예비수험생을 자녀로 둔 학부모일 것입니다. 대입에서 학교생활기록부를 주로 반영하는 수시 전형도 있지만 여전히 수능의 영향력은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수능은 한 날 한 시에 같은 문제를 모든 수험생이 동시에 치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시험이 또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무원 시험입니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있습니다.
이런 공무원 시험에 해당하는 시험이 고려 시대에도 존재했습니다. 바로 과거입니다. 고려 때 처음 과거 시험이 실시되었답니다. 여기에서는 과거 시험을 처음 시행했던 광종을 포함하여 고려 초기의 왕들의 업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
고려를 세운 사람은 왕건입니다. 우리가 태조라고 부르는 사람이지요. 왕건은 원래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부하였습니다. 왕 씨 집안은 개경 지역의 이름난 가문이었는데, 궁예가 이 지역으로 세력을 넓히자 그 밑으로 들어가서 기회를 엿봅니다.
후고구려가 있었으면 후백제도 있었겠지요? 통일 신라 말기에는 중앙 정부의 통제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 틈을 타 옛 백제 지역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철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각각 건국했습니다. 후삼국시대의 시작입니다.
궁예가 백성들에게 신망을 잃자 그 뒤를 이어 왕건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후백제를 격파하고 통일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항복하면서 한반도가 다시 고려로 통일되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오랜 전쟁과 수탈로 피폐해진 민생을 돌보기 위해 세금을 인하하였고, 정기적으로 연등회와 팔관회라는 행사를 열어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왕건이 후삼국 시대를 통일하는 데에는 지방 호족들의 지원이 한몫했습니다. 그래서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역분전이라는 토지를 나눠주어 공을 치하하였습니다.
그런데 호족들은 지방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확실하게 내 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 씨 성을 하사하거나 정략결혼을 통해 친척 관계를 만들어 우호를 다졌습니다.
태조 왕건은 이런 회유책 말고도 강경책으로 호족 세력을 통제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입니다. 지방의 힘 있는 호족을 그 지방의 사심관으로 임명하고 그 지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한 제도가 사심관 제도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자리를 비울 때 학급 회장에게 조용히 하게 하고 자리를 비운 다음, 만약 그 사이 학급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면 들어와서 학급 회장을 혼내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기인 제도는 호족의 자식을 수도 개경에 불러들여 질 높은 교육을 시켜주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것 아니냐고요? 네. 좋은 제도입니다. 하지만 만약 호족이 다른 마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면 그 자식 먼저 처형당했을 것입니다. 즉, 호족의 자녀를 인질로 삼아버린 것입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때 즈음해서 통일 신라 북쪽에 있던 발해가 거란족에 의해 멸망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잃은 발해 유민들 중 상당수가 고려로 넘어옵니다. 왕건 입장에서는 이들의 마음을 달래주어 내 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하여 거란이 우호를 다지자며 선물로 보내온 낙타를 다리에 묶어 굶어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북진 정책으로 고려의 영토를 청천강까지 넓혔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왕건도 사람인지라 나이를 먹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후대 왕들에게 남기는 메시지 10개를 남겼는데, 이를 훈요 10조라고 합니다.
왕권을 안정시킨 광종
호족 통합 정책으로 왕건은 호족의 딸들과 결혼을 많이 했습니다. 부인이 무려 29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식이 또 얼마나 많았을까요? 자식이 많으면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을까요? 네. 왕위 다툼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조선에서도 3대 왕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었는데,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즉위했습니다.
고려에서도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불안정했던 왕권은 고려 4대 왕 광종 대에 이르러서 안정됩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되었던 양민들을 다시 양인으로 풀어주었습니다.
이 정책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첫째, 호족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당시 호족들은 노비를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이 정책으로 인해 호족들의 노비가 양민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호족 세력이 약화로 이어졌습니다.
둘째, 국가 재정이 안정되었습니다. 노비는 '사람 형체를 한 물건'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세금을 낼 의무가 없었습니다. 이런 노비들이 양민이 되면서 세금 납부의 의무가 생겼습니다.
호족 세력의 약화는 곧 왕권 강화를 의미했습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으로 왕권 강화와 국가 재정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입니다.
광종 때 중국 후주라는 나라에서 쌍기라는 사람이 고려에 귀화하여 머물고 있었습니다. 광종은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처음 도입합니다. 이제부터는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게 된 것입니다.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안정화시켰을 뿐 아니라 과거제를 도입함으로써 관리 등용 제도를 체계화한 광종은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중국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광덕', '준풍'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연호는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데, 이런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스스로를 황제라고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통치 체제를 구축한 성종
고려 6대 왕 성종이 즉위하였습니다. 이때 유학자 최승로가 28가지나 되는 건의문을 성종에게 제출했습니다. 이 건의문을 시무 28조라고 부릅니다. 주요 내용은 유학을 정치에 도입하라는 것과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 교육 기관으로 국자감을 두었습니다. 국자감은 요새로 치면 국립대학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성균관이 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한편, 지방 주요 거점 12곳을 12목이라고 하는데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고려 정부는 꾸준히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여 고려 8대 왕 현종 대에는 5도 양계 체제로 개편되었습니다. 또, 성종은 중앙 정치 기구로 중국 제도를 본따 2성 6부제를 마련하였습니다. 중국 제도를 본따긴 했지만 조직이나 운영은 고려 실정에 맞게 독자적으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려라는 나라의 시스템을 안정화시킨 성종 시기가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북방 유목민 거란족이 공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원포인트 레슨
1. 태조, 광종, 성종의 업적을 키워드 중심으로 잘 정리해두세요.
2. 특히, 광종이 자주 출제됩니다. 과거제-노비안검법은 세트입니다. 한 묶음으로 알아두세요.
기출풀이
[2023-대학수학능력시험]
광종의 업적을 물어본 문항입니다. 자료의 ‘쌍기’, ‘과거제’ 등을 통해 밑줄 친 ‘왕’이 고려 광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④)하여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습니다.
광종은 단골 주제입니다만, 출제되는 키워드는 매우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과거제-노비안검법이 세트입니다. 과거제가 자료로 제시되면 노비안검법이 정답으로 나오고, 노비안검법이 자료에 나오면 과거제가 정답으로 제시됩니다. 두 키워드를 묶음으로 알아두세요.
[2022-대학수학능력시험]
성종의 업적을 물어본 문항입니다. 자료의 ‘최승로’, ‘시무 28조’ 등을 통해 밑줄 친 ‘왕’이 고려 성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방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는 한편, 국자감을 설치(③)하여 유학 교육을 장려하였습니다.
성종 또한 광종처럼 키워드가 뻔합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지방관 파견-국자감 정비 정도 출제되니 정리해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