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과 여진의 침입
싸우지 않고 오직 외교로서 거란을 돌아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영토까지 넓힌 서희에 대해서는 다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나중에 저런 훌륭한 외교관이 되어야지!'라고 다짐한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란은 그 뒤로도 두 번이나 더 공격해 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체 왜 거란은 그 뒤로도 두 번이나 더 공격을 해왔을까요? 고려는 여기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지금부터 동아시아의 격동기였던 10세기 말로 돌아가보겠습니다.
거란이 고려를 공격한 이유
중앙 정치 기구를 마련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며 국자감이라는 유학 교육기관까지 세우며 고려의 기틀을 마련한 왕, 성종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성종 시기에 북방 유목민 거란이 쳐들어옵니다. 거란은 왜 갑자기 쳐들어왔을까요? 상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잠깐 중국의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당이 멸망하고 약 60여 년간 중국은 5대 10국 시대라고 하는 혼란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이때 여러 나라들이 생겨났다가 멸망하는 일이 계속됩니다. 고려가 이 시기에 후삼국을 통일한 것입니다. 중국의 혼란의 시기는 고려 초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과거제 도입을 건의했던 쌍기의 나라 후주도 바로 이 시기에 잠시 있었던 나라입니다.
이런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 대륙을 재통일한 나라가 바로 송입니다. 그런데, 송은 반란이 두려워 문치주의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군인 세력을 누르고 문신 세력을 우대한 정책이 문치주의 정책입니다. 자연스럽게 국방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중국의 북쪽 만주 지역에는 유목민 거란족이 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나라 이름을 요라고 정하는 한편, 송을 공격하여 중국대륙을 지배하고 싶어 했습니다.
문제는 고려였습니다. 고려는 당시 중국 대륙의 송을 '큰 형님'으로 대우하면서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거란이 송으로 쳐들어갔을 때 고려가 송의 요청으로 거란의 후방을 공격하면 그야말로 낭패입니다. 그래서 거란은 송을 공격하기 앞서 먼저 고려를 공격하여 겁을 주거나, 적어도 자기편으로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 성종 때 거란(요)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거란의 침입과 격퇴
서희는 거란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거란족 대장 소손녕과 마주합니다.
소손녕이 거만하게 말합니다.
"너희 고려는 신라땅에서 일어났으므로, 신라 국경이었던 대동강 북쪽 땅(태조 왕건이 청천강까지 넓힌 땅)을 다 내놔라."
그러자 서희가 대답합니다.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래서 이름도 고(구)려인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오히려 땅을 내놓아야 할 사람은 너희들이다. 너희가 차지하고 있는 만주 지역은 바로 고구려땅이었다."
한 방 먹은 소손녕이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음. 과거 이야기는 이제 그만 묻어두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보자. 너희 매번 송나라와만 교류하지? 이번에 송과 교류를 끊고 우리와 교류하면 물러가마."
서희는 미끼를 던져봅니다.
"우리도 너희와 교류하고 싶다. 그런데, 너희와 우리 사이 압록강 지역에는 여진족이 흩어져 살고 있어서 우리가 통하지 못한 것이다."
소손녕이 그 미끼를 뭅니다.
"그건 걱정마. 우리가 다 쫓아주마."
서희가 쐐기를 박습니다.
"좋아! 그럼 우리가 그 지역에 방어를 위한 성을 쌓고 너희와 교역할게."
고려는 이렇게 해서 압록강 근방의 6개 성을 획득합니다. 바로 강동 6주입니다. 적군의 공격을 물렸을 뿐 아니라 영토까지 확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에도 고려는 여전히 송과 교역을 합니다. 한 마디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셈입니다. 이에 거란은 두 차례나 더 쳐들어왔습니다. 그중 2차 침입 때는 고려왕이 피난 가고 수도 개경이 함락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때 부처의 힘을 빌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초조대장경을 판각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3차 침입때는 청천강 근방 귀주에서 강감찬이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귀주대첩).
귀주대첩 이후 고려는 거란이 다시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국경 지역에 천리장성을 쌓고 수도 개경을 빙 둘러서 나성을 쌓아 국방력을 강화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거란은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송과 거란, 고려 세 나라가 어느 정도 세력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란이 세운 요가 멸망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체 누가 강력한 요를 무너뜨렸을까요? 그것은 바로 여진이었습니다.
여진의 토벌과 사대
여진족은 고려 국경 근처에서 작은 부족 단위로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2세기에 여진족이 통일을 이루면서 천리장성 부근까지 세력을 넓혀 고려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윤관은 여진 정벌을 위해 기마병이 필수적이라 판단하고 보병, 기마병, 그리고 스님으로 이루어진 승병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편성합니다. 이 특공부대를 별무반이라고 부릅니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여 동북 지역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동북 9성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그러자 생활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동북 9성을 되돌려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관리에도 어려움이 있어 결국 고려는 여진족에게 동북 9성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수였습니다. 여진족은 이곳을 기반으로 삼아 더욱더 성장하여 금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거란(요)을 멸망시켰습니다. 내친김에 중국까지 나아가 송을 공격하여 중국 북부를 차지해 버립니다. 그리고 고려에게 자신들을 '큰 형님'으로 모시라고 사대요구를 해왔습니다.
고려는 어떻게 했을까요? 놀랍게도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사대요구에 응하고 말았습니다. 거란과 3차례나 맞서 싸우던 고려의 기백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비밀은 당시 지배층에 있습니다.
원포인트 레슨
1. 거란의 침입과 관련된 키워드를 정리해두세요.
2. 여진 토벌과 사대 요구와 관련한 키워드를 정리해두세요.
기출풀이
[2023-3월 학력평가]
금이 사대 요구하고 이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던 시기를 물어본 연표 유형의 문항입니다. 자료에서 ‘금이 전성기를 맞아’, ‘신하로 삼으려’ 등을 통해 이 상황은 금이 고려에 사대 요구를 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차례의 거란 침입 이후 여진이 성장하여 금을 건국하고 고려에 사대 요구를 하였습니다. 이후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거쳐 무신 정변으로 무신정권이 성립되었고,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왕실은 강화도로 천도하였습니다. 따라서 거란 3차 침입 때의 전투인 귀주대첩과 강화 천도 사이인 (다) 시기(③)가 정답입니다.
거란의 침입과 여진의 침입과 대응은 자료를 주고 결과를 물어보는 유형이 일반적이지만 가끔 순서를 물어보거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물어보거나 연표를 통해 시기를 찾으라는 유형이 출제되기도 합니다. 이 경우 난이도가 올라가게 됩니다. 키워드와 함께 각 순서도 알아두세요.
[2022-6월 모의평가]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의 외교 담판 결과를 물어본 문항입니다. 자료에서 ‘소손녕’, ‘서희’ 등을 통해 자료가 거란 1차 침입 당시 서희의 외교 담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였습니다(③).
거란 관련 키워드와 여진 관련 키워드를 잘 정리해두어야 합니다. 거란의 경우 서희, 강동 6주, 강감찬, 귀주대첩이 자주 등장합니다. 여진의 경우 윤관, 별무반, 동북 9성, 사대 요구가 핵심 키워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