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벌의 동요와 무신정변
고려 전기에 이자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자겸은 고려 17대 왕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었습니다. 네. 오타 아닙니다. 가만히 따져볼까요? 외할아버지라는 말은 어머니가 이자겸의 딸이라는 뜻입니다. 장인이라는 말은 아내가 이자겸의 딸이라는 뜻입니다. 즉, 인종은 이모와 결혼을 한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지금부터 고려의 지배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문벌의 형성
태조 왕건이 고려를 통일하는 데는 지방 세력가들, 즉, 호족의 도움이 컸습니다. 때문에 고려 통일 이후에도 호족 세력은 여전히 강성했습니다. 광종 때 과거제가 실시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호족들의 세력은 약화되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가문들은 과거나 음서를 통해 대대로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즉, 호족들 사이에서도 잘 나가는 가문과 그저 그런 가문으로 격차가 벌어진 것입니다.
음서란, 아버지가 높은 관직에 있으면 자식도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에 등용되는 일종의 특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처럼 대대로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권력을 유지한 세력을 문벌이라고 부릅니다. 여진족이 쳐들어오던 11세기에서 12세기에 이런 문벌 세력이 고려의 지배층을 형성하게 됩니다.
삼국사기라고 들어봤나요?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문벌 세력입니다. 앞서 말했던 이자겸은 세 딸을 두 왕에게 시집보내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여진(금)이 중국 북부를 차지하고 사대요구를 해오자 김부식, 이자겸 등의 문벌 세력은 싸워보지도 않고 여기에 응하고 말았습니다. 기득권층의 입장에서는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르는 전쟁을 하기보다는 여기에 굴복하여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 결정은 나중에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한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이자겸의 권력남용이 심해지자 왕도 점점 그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이에 오히려 이자겸은 무장 척준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이자겸의 난). 하지만 인종의 설득으로 척준경은 마음을 돌려 오히려 이자겸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이때 서경(지금의 평양) 출신 묘청이라는 스님이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인종에게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라고 건의를 합니다. 이자겸의 난으로 심란했던 인종도 이번 기회에 수도를 옮겨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의 문벌 세력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마침 이즈음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반대 여론이 높아집니다. 신중했던 인종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돌려 서경으로 수도 옮기는 일을 없던 일로 돌려버립니다.
그러자 묘청이 서경의 귀족 세력들과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묘청의 난). 중앙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서경 귀족 세력은 수도를 자신들의 근거지로 옮겨오면 개경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서경 천도 운동을 적극 지지했거든요. 그런데 그 일이 수포로 돌아가니, 무력으로라도 진행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명분이 필요합니다. 이때 묘청 세력이 내세웠던 명분은 금국 정벌이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자겸 등의 문벌은 무기력하게 금의 사대요구에 응하고 말았습니다. 묘청 세력은 여기에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였고 나아가 금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대위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천개라고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개경으로 진격할 것임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종은 참 불쌍한 왕입니다. 이자겸의 횡포를 몸소 겪은 데다가 1126년 금의 사대요구에 응하였고, 같은 해 이자겸의 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약 10여 년 뒤인 1135년에는 묘청의 난을 겪었습니다. 단 하루도 마음 편안한 날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무신정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문벌 세력의 무능과 부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두 차례의 난 모두 백성들을 위한 일도 아니었고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들끼리 권력을 다투느라 일어난 갈등이었습니다. 이 갈등을 해결하는데 많은 군인들이 동원되었겠지요? 즉, 개경의 문벌은 군인들이 잘 싸워줬기 때문에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고려는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차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문벌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장난 삼아 나이 지긋한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우는,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격변을 겪은 인종 다음 왕인 의종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정사를 돌보지 않고 문신들과 함께 연회를 열어 향락에 빠져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향락에 빠져 있을 때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 무신들은 호위의 임무를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무신들의 불만이 높아져가고 있었습니다.
운명의 그 날. 그 날도 의종은 문신들과 함께 보현원이라는 곳에 행차하여 연회를 열려고 했습니다. 보현원으로 가는 길에 잠깐 쉬게 되었는데, 이때 의종은 수박희라는 전통 무예를 무신들에게 시켰습니다. 무신들의 경기를 지켜보며 문신들은 즐거워했습니다. 대장군 이소응은 나이가 많아 젊은 상대 무신들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젊은 문신 한뢰가 뛰쳐나와 이소응의 뺨을 후려치며 비웃었습니다. 이때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은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보현원에 도착했을 때 무신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문신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1170년에 일어난 무신정변의 시작이었습니다.
무신정권
무신정변은 하룻밤에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이후 100년 간 무신정권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초기 무신들은 중방이라는 기구를 통해서 중대사를 논의하였습니다. 하지만 무신들 사이에서 권력 쟁탈전이 일어났고, 그 사이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혼란을 정리한 사람이 최충헌이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최 씨 가문이 권력을 세습하게 됩니다. 그래서 최 씨 정권이라고도 부릅니다. 최 씨 정권은 최충헌이 설치한 교정도감에서 주요 정책을 결정하였고, 호위 부대로 삼별초를 두었습니다.
무신 정권기에는 국가 통제력이 약화되어 지방에서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졌습니다. 하층민의 봉기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망이, 망소이의 난, 만적의 난 등입니다. 이들은 주로 차별받는 지역인 향, 부곡, 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거나, 노비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하층민의 봉기는 곧 진압되었고 가혹한 응징이 뒤따랐습니다. 무신 정권을 무너뜨린 계기는 나라 안이 아니라 나라밖에서 오게 됩니다.
원포인트 레슨
1.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무신정변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의 순서를 알아두세요.
2.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의 영향을 정리해두세요.
3. 무신정권기의 키워드를 정리해두세요.
기출풀이
[2024-6월 모의평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에 대한 문항입니다. 자료에서 ‘이자겸’, ‘묘청’ 등을 통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탐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사건으로 고려 전기 지배층이었던 문벌이 동요하고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무신정권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둘을 묶을 수 있는 주제로는 고려 문벌 사회의 동요(②)가 가장 적절합니다.
크게 물어본 문항입니다.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고려 시대에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만 알아도 정답을 고를 수 있는 문항입니다. 어렵게 출제된다면, 연표를 제시하고 일어난 시기를 고르는 유형으로 출제될 수도 있습니다. 키워드와 순서를 함게 정리해두세요.
[2022-대학수학능력시험]
무신 정변에 대한 문항입니다. 자료의 ‘정중부’, ‘이의방’, ‘거사’ 등을 통해 무신들이 정변을 모의하는 장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이후 문벌이 동요하고 차별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무신 정변을 일으켰습니다(④).
이 문항 역시 크게 물어본 경우입니다. 정중부 등이 고려의 무신이라는 것만 알아도 쉽게 정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 문항과 마찬가지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 정변에 이르는 사건들을 묶어서 순서와 키워드를 잘 정리해두세요.